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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1.03 돈의 힘(THE ASCENT OF MONEY) (BBC, 200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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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부 지불 약속(Human Bondage)


채권 : 정부 혹은 은행이나 회사가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차입하기 위해 발행하는 유가증권

정부는 징수한 세금보다 더 많은 돈을 지출할 때가 많은데 그럴 경우 채권을 팔아 그 차액을 메운다.

빌 그로스 : 채권펀드사인 핌코의 회장. 만약 빌 그로스가 채권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다면 세계 경제는 그야말로 원자폭탄을 맞을 것이라고 한다. 前블랙잭 플레이어.

채권시장은 전쟁에서 비롯됐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도시들은 중세 대부분을 전쟁속에서 보냈다. 채권시장을 통해 전쟁자금을 대는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생겨났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정부는 시민들에게서 세금을 걷고 의무적으로 그들로부터 돈을 빌려서 충당했다. 이런 강제성을 수반한 대부의 대가로 시민들은 이자를 받았다. 당시 채권은 유동자산으로 급전이 필요하면 팔 수 있었다. 채권시장에서 거래가 허용되었던 것이다.

콘도티에리 : 르네상스 시절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용병징집인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의미없는 전쟁이 계속되자 부채가 늘었고 채권을 더 많이 발행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채권의 가치는 떨어졌다.

위험을 감수할 용기만 있다면 원금을 회수할 수도 있다. 또한 금융시장 전체의 이자율을 결정하는 것 역시 채권이다.

로스차일드 : 워털루 전투의 승패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1810년부터 1836년사이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의 다섯 아들들은 국제 금융계의 거물로 급부상한다. 19세기 채권시장의 진정한 황제, 네이선은 셋째 아들로 자신을 전쟁과 평화의 중재자라고 하였다.

주덴도이치 : 히브리 문자를 사용한 독일어로 우편물의 내용을 엿보는 걸 막기 위해 사용했다.

워털루 전투는 영국과 프랑스간의 갈등이 절정에 이른 전투로 두 나라 금융제도의 우열을 가르는 계기였다. 전쟁자금을 약탈에 의존한 프랑스와 채권에 의존했던 영국의 금융 싸움이었다. 영국 정부는 전쟁을 앞두고 엄청난 양의 채권을 발행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성공한 이유는 워털루 전투의 승패가 채권가격에 미칠 영향을 정확히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나치독일이 상영을 허락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부당이득에 관한 영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네이선은 프랑스 장군을 매수해 영국군의 우세를 확인한다. 그리고 나서 영국군이 열세라고 런던에 헛소문을 퍼뜨린다. 놀란 영국인들이 정부 채권을 헐값에 처분하자 네이선은 서둘러서 채권을 사들인다.

하지만 1815년 상황이 달라졌다. 영국 정부는 채권판매로 엄청난 현금을 보유하게 된다. 전장으로 향하던 웰링턴 공작은 채권보다는 언제 어디서나 지불가능한 통화가 필요했다. 네이선은 채권시장에서 빌린 돈을 금으로 바꿔 웰링턴 공작에게 조달한다. 1814년 1월 11일 영국의 재무장관은 영국군 총 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 네이선 로스차일드를 영국 정부의 대리인으로 임명한다. 네이선은 유럽대륙에서 금과 은을 최대한 많이 모아 진격중인 웰링턴 공작에게 전달해야 했다.

네이선은 유럽전역에 뻗어 있던 가족중심의 금융 네트워크를 이용해 훌륭하게 완수한다. 예를 들어 파리의 금값이 런던보다 비쌀때는 파리에 있는 막내가 금을 판다. 그 다음에 런던에 있는 네이선이 금을 사는 방식이다.

나폴레옹이 유배지를 탈출해 파리로 돌아오자 로스차일드 가문은 금괴와 은괴 동전들을 사모은다. 나폴레옹이 주도한 이전의 전쟁들처럼 장기전이 될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금을 찾을 것이고 당연히 가격이 오를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다. 하지만 전투는 하루만에 결정됐고 영국군의 승리로 로스차일드 가문은 무용지물이 된 금을 싼 값에 산 꼴이 되어 버렸다. 전쟁이 끝나면 군대는 해산될 것이고 군인들에게 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어져 치솟았던 금값이 폭락할 것이 뻔했다.

네이선은 금을 이용해 영국 채권을 대량으로 사들인다. 워털루 전투의 승리로 영국 채권의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데 기대를 걸었다. 네이선이 채권을 사들이자 채권의 가격이 올라가고 1년이나 계속해서 사들인다. 40%까지 가격이 오르자 네이선은 채권을 되판다. 그 결과 엄청난 시세차익을 남긴다. 채권을 사고 팔아 이윤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당시 로스차일드 가문은 금융권에서 사람들의 두려움을 받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반(反)유대주의의 편견을 자극했다.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막기도 하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양면성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증오한다. 돈을 벌기 위해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쟁이 필요했다.

미국의 남북전쟁 역시 배후에 채권시장이 있었다.
남부는 시민들에게 채권을 팔아 전쟁비용을 충당하려고 했지만 남부의 자본은 한정돼 있었고 이를 극복하고자 로스차일드 가문에 손을 내민다. 하지만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미 가치를 상실한 남부의 채권을 사지 않았다. 남부의 뉴올리언즈는 남부의 주요 수출품인 목화의 판로였다. 남부는 목화를 채권지급 담보물로 내놓아 이자를 지급하지 못할 경우 목화로 대신하겠다며 투자자들을 안심시킨다.

목화담보 채권은 목화의 공급을 제한할 경우 목화와 채권의 가격이 동반 상승하였다. 목화의 중요성을 안 남부는 영국 리버풀로 들어가는 모든 목화를 회수한다. 영국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려는 전략이었다. 목화값은 치솟았고 목화담보 채권도 가격이 올랐다. 반면 영국의 방직공장은 가동을 멈추게 되고 목화기근으로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는다. 영국 경제는 침체에 빠진다.

1862년 4월 28일 남부의 뉴올리언즈가 북부의 손에 넘어가면서 남북전쟁은 전환기를 맞이한다. 목화담보 채권은 값이 계속 상승했는데 남부가 채권시장을 마음대로 조정하려면 투자자들이 채권의 이자를 지급받지 못할 경우 남부가 나서서 목화의 소유권을 보장해주는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하지만 목화 판로를 잃은 남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1863년 영국의 방직공장들은 중국과 이집트, 인도 지역에서 새로운 목화 공급원을 찾았다. 그러자 목화담보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와 남부경제가 동시에 붕괴된다. 남부의 국내 채권시장이 몰락하자 당장의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지폐를 발행한다. 전쟁 막바지 북부의 그린벡이 장당 50센트였다면 남부의 그레이벡은 장당 1센트에 불과했다. 남부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려 물건값은 기존보다 90배 치솟는다. 남부는 동서로 분열되고 전쟁에서 패한다. 남부 패전의 진짜 이유는 재정 문제였다.

채권시장의 황제 빌 그로스도 채권의 고정이율 가치를 떨어뜨리는 인플레이션을 두려워 한다. 인플레이션 초기에 채권 가격은 하락한다.

은의 땅이라는 뜻의 아르헨티나는 미국과의 국민소득 차이가 18% 에 불과하던 시절도 있었다. 자원이 풍부한 나라도 금융위기가 반복되면 망할 수 있다.

금융파국은 몇 가지 단계를 거친다.
먼저 징수한 세금에 비해 정부 지출이 과다한 경우인데 전쟁이 원인이다. 아르헨티나는 1970년대 내전과 1982년 포클랜드 제도를 둘러싼 영국과의 전쟁이 있었다. 1989년 2월 한달만에 물가가 10% 상승한다. 정부는 은행을 폐쇄하고 환율폭락을 막기 위해 노력하지만 한달 만에 달러에 비해 140% 하락한다. 정부가 공공부문의 적자를 해소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세계은행에서 대출을 동결한다. 아르헨티나는 공채를 팔아 재정적자를 메우려 했지만 투자자들은 곧 휴지조각으로 변할 채권을 살 의향이 전혀 없었다. 중앙은행의 외환 보유 잔고가 바닥난다는 소문이 돌자 국공채 가격이 폭락했다.

외채도 빌릴 수 없고, 누구도 채권을 사려하지 않자 아르헨티나 정부는 중앙은행을 통해 화폐를 더 많이 발행하도록 한다. 돈의 가치는 점점 더 하락했다. 물가가 1년만에 12,000% 상승했다.

존 메이나드 케인즈 : 영국의 경제학자로 <케인즈 경제학> 이론을 창시했다.

케인즈는 채권소유자들의 안락사를 예언했다. 인플레이션이 로스차일드 가문과 같은 금융재벌의 부를 잠식할 거라 주장했다. 하지만 1970년에는 그 말이 사실인듯 보였으나 채권 시장은 부활했다. 채권 투자자들의 수가 증가하여 부활이 가능했다.

600년전 채권이 생겨난 이탈리아는 노령화 속도가 유럽에서 가장 빨랐다. 노령화 사회에서는 채권과 같이 수익이 고정된 증권이 거래된다.

인플레이션이 연금과 예금의 실제 가치를 떨어뜨릴 것이라는 걱정이 크다. 인플레이션에 관대했던 중앙은행은 채권시장에 그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 채권을 더 팔아 국고 재원을 확보할 생각이라면 정부는 금융위기로 파산한 은행을 구제할 때 신중해야 한다.



2011/01/03 - [감상/다큐] - 돈의 힘(THE ASCENT OF MONEY) (BBC, 200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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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부 탐욕의 시작(Dreams of Avarice)


잉카 제국엔 돈이란 것이 없었다. 귀금속은 미적인 가치만 지닐 뿐이었다. 금은 해님의 딸, 은은 달님의 눈물이라 불렀다.

프란시스코 피사로 : 잉카제국을 정복하고 페루의 수도인 리마를 건설했다.

까하마르까 : 페루 북부 산악지대 까하마르까 주(州)의 수도로 잉카문명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스페인 통치 250년 동안 안데스 산맥에서 2만 5천톤의 은을 캐냈다. 탐욕에 빠진 스페인 왕가는 그들이 꿈꾸던 것 이상으로 부유해졌다. 하지만 스페인의 경제적 정치적 몰락을 막을 수 없었다. 은의 가치를 하락시킬 정도로 지나치게 많이 채취한게 문제였다. 똑같은 물건에 더 많은 가치가 매겨지면서 물가는 오르기만 했다. 교환가치 만큼만 값어치가 있다는 돈의 속성을 몰랐던 것이다.

4,000천년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점토판에 금융거래를 기록했다.

돈은 믿음이다. 화폐를 발행한 중앙은행에 대한 믿음, 수표를 발행한 은행에 대한 믿음, 돈은 금속이 아니라 믿음인 셈이다. 종이나 은, 점토, 또는 컴퓨터 화면이든 받는 이가 믿으면 그뿐이다. 상호신뢰체제의 근간을 이룬다.

영어의 Credit 은 라틴어 Credo 나는 믿는다 에 어원을 두고 있다. 신용이란 개념이 없었다면 세계 경제사는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대 문명은 대출과 차용에 많은 부분 의존하고 있다.

레오나르도 피보나치의 계산의 책(리베르 아바치)에는 동양 수학 사상이 소개되어 있다. 아라비아 숫자가 로마숫자보다 우수하다고 소개한다. 피보나치 수열 역시 이 책에 소개되어 있다. 회계, 환전, 이자계산에 새로운 계산법을 적용했다.

두캇(ducat) : 12세기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 유럽에서 국제화폐로 사용했던 금화

초기 대부업자는 환영받지 못하고 천대 받았다. 그들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의 유대인들은 게토 누오보(ghetto nuovo) 라는 강제 거주 지역에 살아야 했다. 베네치아에서 유대인의 존재가 용인된 이유는 기독교도 상인들이 하지 않는 서비스, 즉 대금업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도들에겐 이자를 받는 것이 죄악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들 형제, 유대인들끼리 이자를 받는 것은 안되지만 남에게서 받는 것은 문제 삼지 않았다.

베네치아 유대인들은 작은 탁자를 놓고 의자에 앉아 돈놀이를 했다. 영어 Bank 는 의자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Banco 에서 유래됐다.

고리대금 서비스를 제공한 대가로 유대인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받았다. 그럼에도 채무자들이 유대인에게 돈을 갚은 이유는 그들이 규모를 키웠기 때문이다. 15세기 이탈리아 게토 지역에 합법적인 은행이 생긴다.
은행의 출현과 함께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메디치家 가 동방무역과 금융업으로 번성하기 시작한다. 메디치 가문은 막대한 영향을 행사한다. 미켈란젤로부터 갈릴레오까지 르네상스 시대 전체를 후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디치가는 환전업 조합 가운데 하나였다. 1390년 이전만 해도 메디치가는 동네 불량배로 저질 폭력으로 유명했다. 피렌체에서 각종 범죄를 저질러 17년 간 가문 중 5명이 사형을 당했다. 그러던 중 지오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등장해 양모조합 거리에서 소규모 사업을 이끌어 피렌체의 명가로 성장시킨다.

지오반니 메디치는 고리대금 방지법을 피할 수 있는 독창적인 회계법으로 사업을 합법화 시킬 수 있었다. 이자대신 환전의 대가로 수수료를 받았다. 이자가 드러나지 않는 형태로 신용을 사고 팔았다. 고리대금업이 은행업으로 진화한 순간이었다.

리그로 세그레토 : 지오반니 메디치가 쓴 메디치 은행의 성공담이 기록된 책

메디치 은행의 성공은 다양성을 추구한데 있다. 조합형태로 분권체제를 유지했다. 피렌체, 베네치아, 로마까지 영역을 넓혔다. 규모확장과 분산을 통해 대출에 따른 위험을 줄일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채무자의 비용을 낮출 수 있었다. 이 부분이 고리대금업자와 메디치가의 차이였다.

지오반니의 아들 코시모는 부친 사망 20년 후 피렌체의 군주와 다름없는 자리에 오른다. 그는 보티첼리의 '메달을 들고 있는 청년(1475)'의 주인공 이기도 하다. (보티첼리는 '동방박사의 경배(1476)'에서도 메디치가의 금융성공을 그려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현대 금융이 미국으로 넘어오면서 세계 경제의 판도가 바뀌었다. 미국은 채무를 발판으로 성장한 나라이다. 메디치 은행이 부유층만을 상대한 반면에 미국 은행들은 누구에게나 돈을 빌려준다.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는 파산자들로 유명하다.  각종 담보 대출, 전당포, 혈액 구매 등 파산자들을 상대로 하는 경제 활동이 활발하다. 중세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파산은 경제적으로 심각한 것이었으나 미국 자본주의에서는 빚을 졌다 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1898년부터 파산법에 따라 채무 청산과 개인 회생이 보장되었다. 오늘의 파산자가 내일의 억만장자가 될 수 있었다. 실패 후 재기의 기회가 주어진다. 은행 입장에서는 대출 가운데 일부가 연체되었다고 생각하고 파산은 채무이행계획을 다시 세우는 것에 불과했다.

대출은 경제성장의 기초다. 은행의 출현이 가능해야 고리대금업에서 다음단계로 성장이 가능하다. 채무자들이 정상적으로 대출받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고리대금에서 벗어날 수 있다. 투자자 역시 믿고 맡길 곳이 있어야 자신의 지갑을 열 수 있다.

하지만 은행이 해결책은 아니다. 2007년, 멤피스의 불량 채권이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야기했다. 은행의 주택담보대출이 증권의 형태로 바뀌어 무분별한 투자자들 사이에서 거래되어 은행과 채무자의 정상적인 관계가 깨진것이 원인이다. 금융업이 지나치게 복잡해져 연이은 금융혁신으로 멤피스 같이 가난한 가정에서 받은 주택담보대출을 CDO(Collateralized Debt Obilgation : 부채담보부증권으로 회사채나 대출채권 등 기업의 채무를 기초자산으로 유동화증권을 발행하는 금융기법)로 바꿔버렸다. 납을 금으로 만들고 쓰레기를 우량채권으로 만드는 금융의 연금술이 가능했던 것은 은행과 함께 현대 금융의 양대 축을 이루는 채권시장이 급성장했기 때문이다.



2011/01/03 - [감상/다큐] - 돈의 힘(THE ASCENT OF MONEY) (BBC, 200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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