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부 저무는 태양 로마제국


하드리아누스 장벽은 영국 북부, 로마 제국 최북단 영토에 건설된 120km 길이의 장벽으로 켈트족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14대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이름을 땄다. 10,000명의 병사 주둔하였고 1.5km 마다 초소를 설치하였고 초소엔 8명의 병사가 주둔하였다.

하드리아누스 장벽 근처에서 요새촌으로 불리는 빈돌란다 요새 유적이 발견됐다.

제국 전체 예산의 절반에 달하는 막대한 예산을 병사들에게 제공하였다. 음식과 집은 무료였다.

빈돌란다 유적에서 발견된 서판에는 "추방", "탈영병" 등의 단어가 발견됐다.

빈돌란다 요새에 주둔하던 병사는 105년에 시작된 2차 다키아 전쟁터(현재의 루마니아 영토에 살던 다키아 민족과 치른 전쟁으로 로마군이 승리)로 보내졌다. 대부분 가족이 있었던 병사들은 재배치를 꺼려 탈영했을 것으로 보인다.

막대한 군사비는 제국을 위협했지만 수도 로마에서는 여전히 호화로운 생활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음식, 옷과 보석, 현금까지 나라에서 지급해 줬다. 로마의 카라칼라 목욕탕은 1,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건설비는 오늘날 $350,000,000 상당에 달한다.

로마제국 은화의 은 함유량이 98% -> 50% -> 30% -> 1% 까지 떨어진다. 늘어나는 지출로 지불능력을 초과하는 돈이 필요하여 저질 주화를 제작하기에 이른 것이다. 통화팽창-저질주화 제조의 악순환이 심화되었다.

14대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막대한 군사비 절감을 위해 도나우 강 북부와 유프라테스 강 동부 지역의 영토를 포기하려 하지만(강을 국경선 삼으면 요새 건설과 장벽 건설 불필요, 주둔 병사의 축소 가능) 영토 확장의 주역들이었던 당시 원로원들의 반대에 부딪쳐 실패하였다. 황제는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 뒤를 이은 황제들은 지출 억제를 위해 호화스런 생활방식을 규제하려 한다.

그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그림. <로마의 타락> 토마스 쿠투르 作

도를 지나친 로마인들의 사치 생활과 제정 상황 악화로 병사들의 임금이 체불되어 반란이 일어나고 군 지휘부의 권위는 상실된다.

해군 함대를 지휘하던 카라오시우스는 영국의 황제를 자처하여 갈리아 지역에서 지지를 받아 자신만의 주화를 제조한다. 황제를 자처하는 반란이 일어난다.

다섯가지 주화가 같은 해에 발행되었는데 저마다 다른 얼굴이다. 서로 다른 지역에 복무하던 로마군 사령관들이 황제를 자처하며 생긴일이다.

내전이 발생하자 이틈을 타 적들이 침입하였다. 하드리아누스가 죽은 뒤 140년 후 로마 수도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화려한 공공기관을 허문 돌로 보호장벽을 세우기에 이른다.

395년 겨울,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나뉜다. 21년 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다.



2011/01/24 - [감상/다큐] - 사상 최초의 초강대국 로마제국 (NHK, 200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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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부 로마제국의 빛과 그림자


폼페이는 베수비오스 화산폭발로 주민 2,000여명과 함께 도시 전체가 3m 아래에 파묻히게 된다. 1,700년 만에 발굴된 유적으로 로마시대 생활상을 그대로 알 수 있는 타임캡슐이다.

로마 시와 남부를 잇는 고속도로인 비아 아피아(Via Appia)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바로 그 길이다.

화산 쇄설물은 화산폭발에 따른 암석 파편으로 크기에 따라 지름 2mm 이하를 화산재, 2~32m를 화산력, 32mm 이상을 화산암과로 분류한다. 하지만 네이버 백과사전에서의 정의는 다르다. 직경이 1/16mm 이하의 세립은 화산진(volcanic dust), 1/16mm~2mm 정도의 입자는 화산재(volcanic ash), 2~64mm 크기는 화산력(lapilli), 64mm 이상의 것 중에서 모가 난 것을 화산암괴(volcanic block), 둥근 것을 화산탄(volcanic bomb)이라 한다. 아마도 일본과 우리나라의 분류기준이 다른 것일수도 있겠다.

폼페이는 도시 가운데 광장이 있고 그 주변에 정부 청사들이 있었다. 길은 가운데 낮은 길이 마차길, 양 옆에 그보다 높은 길이 인도였고 지대가 낮은 마차길 중간 중간에 징검다리 형식의 횡단보도를 설치하였다. 공중 식수대를 곳곳에 설치하여 온종일 주민들에게 물을 공급하였다. 모든 시민이 안락하게 살도록 설계된 도시였다.

죽었을 때 모습 그대로 어떻게 재현할 수 있었을까. 시신은 화산재에 묻혀 오랜 시간동안 굳어진다. 시신이 썩은 후 굳어진 잿더미 안에 시신 모양의 거푸집 형태의 빈공간이 생긴다. 그 빈공간에 회반죽을 채워넣고 화산재를 걷으면 죽기 직전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다. 

수술 처치 중 혈관, 신경 등의 조직을 붙잡거나 압박을 가하거나 잡아당기는 데에 쓰이는 도구를 겸자라고 한다.

광활한 영토안에 다양한 민족들은 차별없이 동등한 대우를 받았고 모두다 제국의 시민이 되었다. 여러 혜택과 유흥거리로 대중을 회유시키는, 일명 '빵과 서커스' 혹은 '빵과 놀이' 라는 정략이었다. 제국 시민들에게 빵을 무료로 나눠주는데 이는 굶주리지 않도록 충분학 식량을 제공하여 대중의 불만을 막기 위해서였다. 원형극장에서 서커스 형식의 놀이를 제공하여 백성들을 재밌게 하는 등 복지를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 지배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막강한 군사력을 통해 얻어진 엄청난 부 덕분에 가능한 정략이었다.

폼페이의 술집은 밤새 열려있고 하루종일 손님을 받았다.

지방 집정관 선거 시 후보자들은 벽에 선거용 포스터를 나란히 붙여놓는다. 지금과 비슷하다. 지방 도시의 평민이라도 지방 집정관에 선출되어 뛰어난 업적을 쌓으면 기사나 원로 계급까지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열띤 선거전을 보였다. 후보들은 자비를 들여 무료로 빵을 나눠주고 파티를 열고 검투극을 보여주는 등 지금으로 보면 뇌물 제공이지만 그 당시에는 허용되었다. 그 결과 선거전은 사치스러워 진다.

5대 황제 네로 집권기간에 '빵과 놀이' 정략은 극적인 발전을 보인다. 폼페이시 전체와 맞먹을 정도의 크기의 궁전을 로마에 지었다. 해마다 100여일 동안 원형경기장에서 유혈극을 벌이고 갈수록 잔인해졌다. 검투극을 네로 황제 본인이 연출하기도 하였다.

폼페이 인근에서 발굴된 그 당시 은제 술잔엔 해골과 시구가 새겨져 있다. "쾌락보다 더 소중한 보물은 없다. 미래는 불투명한 것,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삶을 즐겨라."

호화 저택 식당 바닥에 그려진 모자이크는 '식당 바닥을 청소하지 않은 집' 으로 불린다. 사치스런 음식을 먹다말고 바닥에 버리는 당시 생활상이 반영 돼 있다. 모자이크엔 먹다 만 값비싼 음식 조각들이 그려져 있다.

당시엔 현대적인 정형외과 수술이 가능했지만 빈부 격차에 따라 치료 수준도 분명히 달랐다.


폼페이의 빈부격차는 점차 심해졌다. '빵과 놀이' 정략으로 먹을 걱정없이 살던 사람들은 충분한 여가시간을 즐겼지만 대다수가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더 윤택한 삶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었고 현 상태에 만족하고 순간의 쾌락에 빠진 사람도 있었다. 가계 수입 격차가 생기고 빈부격차가 뚜렷해졌다. '빵과 놀이' 정략은 모든이에게 복지를 제공하고 동등한 혜택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결국 평등속의 불평등을 낳았다.

생활이 어려워 집 한켠을 세놓는 사람도 있었다. 극심한 빈부격차로 범죄가 증가하였다.

폼페이와 그 옆 마을 무세리아 사람들 간의 격렬한 유혈 충돌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로마 건국 100년 만에 일어난 일)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스 화산이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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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부 아프리카의 로마제국


암늑대는 고대 로마시의 상징이다. 암늑대가 키운 쌍둥이 형제의 형인 로물루스가 BC 753년에 로마를 건설, 첫 왕이 된다는 신화가 있다.

로마군은 군기가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추첨으로 뽑힌 병사를 본보기로 때려 죽이기도 했다.

BC 27년에 최초의 로마 황제에 오른 옥타비아누스는 '고귀한 자' 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란 칭호를 얻는다.

팀가드 유적은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알제시에 위치한 2,000년 전 로마제국의 계획 도시 유적이다. 유일하게 아직까지 남아있는 로마제국의 생생한 도시 유적이다. 수로 및 도시 급수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고 지하수는 식수로, 빗물은 목욕물로 이용하였다. 도시 내 14개의 공중 목욕탕이 존재하였고 벤치 밑에 빗물이 흐르는(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하수체계를 통해 오수는 도시밖으로 흘러나갔다. 2,000년전 이미 완벽한 상하수 체계 및 도시 기반 시설이 훌륭하게 갖춰져 있던 것이다.

튀니지 카르타고 유적에는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포에니 전쟁 BC 264~146) 의 흔적이 남아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카르타고를 철저하게 불태우고 풀조차 자라지 못하도록 소금을 뿌렸다. 그 정도로 카르타고를 증오하였다.

BC 90~88년 로마 시와 그 동맹 도시간 동맹시(市) 전쟁이 일어난다. 궁지에 몰린 로마는 무력으로 다스리던 지배 방법을 바꾼다.

아우구스투스는 안락한 생활을 위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드넓은 제국의 영토를 이어주는 도로망을 구축했다. 매혹적인 도시를 건설하여 정복된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그를 통해 제국의 군사력 또한 얻을 수 있는 정략이었다.

베테랑은 군복무를 무사하게 마친 퇴역군인을 일컫는다.

팀가드 시민이 되면 시민권을 받는다. 북아프리카 현지인들은 25년간 군복무를 이행하면 로마 제국의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이 자녀의 행복을 위해 군에 지원했고 이로써 로마 제국은 군사력을 꾸준히 늘릴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은 곳곳에 원형 경기장을 건설하여 시민들에게 유흥거리를 제공하였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안정적인 통치력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좌석배치를 통해 철저한 계급사회(황제-원로원-기사-평민-그 외) 인식을 고취시킬 수 있었다. 터키의 에페수스, 튀니지의 엘 젬, 스페인의 타라고나, 영국의 세인트 올번즈, 로마의 콜로세움 등이 있다.

황제의 강력한 권력에 의한 평화, 번영의 시기를 팍스 로마나라고 한다.

"놀이와 웃음, 이런게 바로 인생이리라" 팀가드 유적에서 발견된 메세지로 당시 생활에 만족한 시민이 남긴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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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부 지불 약속(Human Bondage)


채권 : 정부 혹은 은행이나 회사가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차입하기 위해 발행하는 유가증권

정부는 징수한 세금보다 더 많은 돈을 지출할 때가 많은데 그럴 경우 채권을 팔아 그 차액을 메운다.

빌 그로스 : 채권펀드사인 핌코의 회장. 만약 빌 그로스가 채권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다면 세계 경제는 그야말로 원자폭탄을 맞을 것이라고 한다. 前블랙잭 플레이어.

채권시장은 전쟁에서 비롯됐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도시들은 중세 대부분을 전쟁속에서 보냈다. 채권시장을 통해 전쟁자금을 대는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생겨났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정부는 시민들에게서 세금을 걷고 의무적으로 그들로부터 돈을 빌려서 충당했다. 이런 강제성을 수반한 대부의 대가로 시민들은 이자를 받았다. 당시 채권은 유동자산으로 급전이 필요하면 팔 수 있었다. 채권시장에서 거래가 허용되었던 것이다.

콘도티에리 : 르네상스 시절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용병징집인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의미없는 전쟁이 계속되자 부채가 늘었고 채권을 더 많이 발행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채권의 가치는 떨어졌다.

위험을 감수할 용기만 있다면 원금을 회수할 수도 있다. 또한 금융시장 전체의 이자율을 결정하는 것 역시 채권이다.

로스차일드 : 워털루 전투의 승패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1810년부터 1836년사이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의 다섯 아들들은 국제 금융계의 거물로 급부상한다. 19세기 채권시장의 진정한 황제, 네이선은 셋째 아들로 자신을 전쟁과 평화의 중재자라고 하였다.

주덴도이치 : 히브리 문자를 사용한 독일어로 우편물의 내용을 엿보는 걸 막기 위해 사용했다.

워털루 전투는 영국과 프랑스간의 갈등이 절정에 이른 전투로 두 나라 금융제도의 우열을 가르는 계기였다. 전쟁자금을 약탈에 의존한 프랑스와 채권에 의존했던 영국의 금융 싸움이었다. 영국 정부는 전쟁을 앞두고 엄청난 양의 채권을 발행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성공한 이유는 워털루 전투의 승패가 채권가격에 미칠 영향을 정확히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나치독일이 상영을 허락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부당이득에 관한 영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네이선은 프랑스 장군을 매수해 영국군의 우세를 확인한다. 그리고 나서 영국군이 열세라고 런던에 헛소문을 퍼뜨린다. 놀란 영국인들이 정부 채권을 헐값에 처분하자 네이선은 서둘러서 채권을 사들인다.

하지만 1815년 상황이 달라졌다. 영국 정부는 채권판매로 엄청난 현금을 보유하게 된다. 전장으로 향하던 웰링턴 공작은 채권보다는 언제 어디서나 지불가능한 통화가 필요했다. 네이선은 채권시장에서 빌린 돈을 금으로 바꿔 웰링턴 공작에게 조달한다. 1814년 1월 11일 영국의 재무장관은 영국군 총 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 네이선 로스차일드를 영국 정부의 대리인으로 임명한다. 네이선은 유럽대륙에서 금과 은을 최대한 많이 모아 진격중인 웰링턴 공작에게 전달해야 했다.

네이선은 유럽전역에 뻗어 있던 가족중심의 금융 네트워크를 이용해 훌륭하게 완수한다. 예를 들어 파리의 금값이 런던보다 비쌀때는 파리에 있는 막내가 금을 판다. 그 다음에 런던에 있는 네이선이 금을 사는 방식이다.

나폴레옹이 유배지를 탈출해 파리로 돌아오자 로스차일드 가문은 금괴와 은괴 동전들을 사모은다. 나폴레옹이 주도한 이전의 전쟁들처럼 장기전이 될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금을 찾을 것이고 당연히 가격이 오를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다. 하지만 전투는 하루만에 결정됐고 영국군의 승리로 로스차일드 가문은 무용지물이 된 금을 싼 값에 산 꼴이 되어 버렸다. 전쟁이 끝나면 군대는 해산될 것이고 군인들에게 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어져 치솟았던 금값이 폭락할 것이 뻔했다.

네이선은 금을 이용해 영국 채권을 대량으로 사들인다. 워털루 전투의 승리로 영국 채권의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데 기대를 걸었다. 네이선이 채권을 사들이자 채권의 가격이 올라가고 1년이나 계속해서 사들인다. 40%까지 가격이 오르자 네이선은 채권을 되판다. 그 결과 엄청난 시세차익을 남긴다. 채권을 사고 팔아 이윤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당시 로스차일드 가문은 금융권에서 사람들의 두려움을 받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반(反)유대주의의 편견을 자극했다.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막기도 하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양면성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증오한다. 돈을 벌기 위해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쟁이 필요했다.

미국의 남북전쟁 역시 배후에 채권시장이 있었다.
남부는 시민들에게 채권을 팔아 전쟁비용을 충당하려고 했지만 남부의 자본은 한정돼 있었고 이를 극복하고자 로스차일드 가문에 손을 내민다. 하지만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미 가치를 상실한 남부의 채권을 사지 않았다. 남부의 뉴올리언즈는 남부의 주요 수출품인 목화의 판로였다. 남부는 목화를 채권지급 담보물로 내놓아 이자를 지급하지 못할 경우 목화로 대신하겠다며 투자자들을 안심시킨다.

목화담보 채권은 목화의 공급을 제한할 경우 목화와 채권의 가격이 동반 상승하였다. 목화의 중요성을 안 남부는 영국 리버풀로 들어가는 모든 목화를 회수한다. 영국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려는 전략이었다. 목화값은 치솟았고 목화담보 채권도 가격이 올랐다. 반면 영국의 방직공장은 가동을 멈추게 되고 목화기근으로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는다. 영국 경제는 침체에 빠진다.

1862년 4월 28일 남부의 뉴올리언즈가 북부의 손에 넘어가면서 남북전쟁은 전환기를 맞이한다. 목화담보 채권은 값이 계속 상승했는데 남부가 채권시장을 마음대로 조정하려면 투자자들이 채권의 이자를 지급받지 못할 경우 남부가 나서서 목화의 소유권을 보장해주는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하지만 목화 판로를 잃은 남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1863년 영국의 방직공장들은 중국과 이집트, 인도 지역에서 새로운 목화 공급원을 찾았다. 그러자 목화담보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와 남부경제가 동시에 붕괴된다. 남부의 국내 채권시장이 몰락하자 당장의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지폐를 발행한다. 전쟁 막바지 북부의 그린벡이 장당 50센트였다면 남부의 그레이벡은 장당 1센트에 불과했다. 남부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려 물건값은 기존보다 90배 치솟는다. 남부는 동서로 분열되고 전쟁에서 패한다. 남부 패전의 진짜 이유는 재정 문제였다.

채권시장의 황제 빌 그로스도 채권의 고정이율 가치를 떨어뜨리는 인플레이션을 두려워 한다. 인플레이션 초기에 채권 가격은 하락한다.

은의 땅이라는 뜻의 아르헨티나는 미국과의 국민소득 차이가 18% 에 불과하던 시절도 있었다. 자원이 풍부한 나라도 금융위기가 반복되면 망할 수 있다.

금융파국은 몇 가지 단계를 거친다.
먼저 징수한 세금에 비해 정부 지출이 과다한 경우인데 전쟁이 원인이다. 아르헨티나는 1970년대 내전과 1982년 포클랜드 제도를 둘러싼 영국과의 전쟁이 있었다. 1989년 2월 한달만에 물가가 10% 상승한다. 정부는 은행을 폐쇄하고 환율폭락을 막기 위해 노력하지만 한달 만에 달러에 비해 140% 하락한다. 정부가 공공부문의 적자를 해소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세계은행에서 대출을 동결한다. 아르헨티나는 공채를 팔아 재정적자를 메우려 했지만 투자자들은 곧 휴지조각으로 변할 채권을 살 의향이 전혀 없었다. 중앙은행의 외환 보유 잔고가 바닥난다는 소문이 돌자 국공채 가격이 폭락했다.

외채도 빌릴 수 없고, 누구도 채권을 사려하지 않자 아르헨티나 정부는 중앙은행을 통해 화폐를 더 많이 발행하도록 한다. 돈의 가치는 점점 더 하락했다. 물가가 1년만에 12,000% 상승했다.

존 메이나드 케인즈 : 영국의 경제학자로 <케인즈 경제학> 이론을 창시했다.

케인즈는 채권소유자들의 안락사를 예언했다. 인플레이션이 로스차일드 가문과 같은 금융재벌의 부를 잠식할 거라 주장했다. 하지만 1970년에는 그 말이 사실인듯 보였으나 채권 시장은 부활했다. 채권 투자자들의 수가 증가하여 부활이 가능했다.

600년전 채권이 생겨난 이탈리아는 노령화 속도가 유럽에서 가장 빨랐다. 노령화 사회에서는 채권과 같이 수익이 고정된 증권이 거래된다.

인플레이션이 연금과 예금의 실제 가치를 떨어뜨릴 것이라는 걱정이 크다. 인플레이션에 관대했던 중앙은행은 채권시장에 그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 채권을 더 팔아 국고 재원을 확보할 생각이라면 정부는 금융위기로 파산한 은행을 구제할 때 신중해야 한다.



2011/01/03 - [감상/다큐] - 돈의 힘(THE ASCENT OF MONEY) (BBC, 200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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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부 탐욕의 시작(Dreams of Avarice)


잉카 제국엔 돈이란 것이 없었다. 귀금속은 미적인 가치만 지닐 뿐이었다. 금은 해님의 딸, 은은 달님의 눈물이라 불렀다.

프란시스코 피사로 : 잉카제국을 정복하고 페루의 수도인 리마를 건설했다.

까하마르까 : 페루 북부 산악지대 까하마르까 주(州)의 수도로 잉카문명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스페인 통치 250년 동안 안데스 산맥에서 2만 5천톤의 은을 캐냈다. 탐욕에 빠진 스페인 왕가는 그들이 꿈꾸던 것 이상으로 부유해졌다. 하지만 스페인의 경제적 정치적 몰락을 막을 수 없었다. 은의 가치를 하락시킬 정도로 지나치게 많이 채취한게 문제였다. 똑같은 물건에 더 많은 가치가 매겨지면서 물가는 오르기만 했다. 교환가치 만큼만 값어치가 있다는 돈의 속성을 몰랐던 것이다.

4,000천년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점토판에 금융거래를 기록했다.

돈은 믿음이다. 화폐를 발행한 중앙은행에 대한 믿음, 수표를 발행한 은행에 대한 믿음, 돈은 금속이 아니라 믿음인 셈이다. 종이나 은, 점토, 또는 컴퓨터 화면이든 받는 이가 믿으면 그뿐이다. 상호신뢰체제의 근간을 이룬다.

영어의 Credit 은 라틴어 Credo 나는 믿는다 에 어원을 두고 있다. 신용이란 개념이 없었다면 세계 경제사는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대 문명은 대출과 차용에 많은 부분 의존하고 있다.

레오나르도 피보나치의 계산의 책(리베르 아바치)에는 동양 수학 사상이 소개되어 있다. 아라비아 숫자가 로마숫자보다 우수하다고 소개한다. 피보나치 수열 역시 이 책에 소개되어 있다. 회계, 환전, 이자계산에 새로운 계산법을 적용했다.

두캇(ducat) : 12세기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 유럽에서 국제화폐로 사용했던 금화

초기 대부업자는 환영받지 못하고 천대 받았다. 그들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의 유대인들은 게토 누오보(ghetto nuovo) 라는 강제 거주 지역에 살아야 했다. 베네치아에서 유대인의 존재가 용인된 이유는 기독교도 상인들이 하지 않는 서비스, 즉 대금업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도들에겐 이자를 받는 것이 죄악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들 형제, 유대인들끼리 이자를 받는 것은 안되지만 남에게서 받는 것은 문제 삼지 않았다.

베네치아 유대인들은 작은 탁자를 놓고 의자에 앉아 돈놀이를 했다. 영어 Bank 는 의자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Banco 에서 유래됐다.

고리대금 서비스를 제공한 대가로 유대인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받았다. 그럼에도 채무자들이 유대인에게 돈을 갚은 이유는 그들이 규모를 키웠기 때문이다. 15세기 이탈리아 게토 지역에 합법적인 은행이 생긴다.
은행의 출현과 함께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메디치家 가 동방무역과 금융업으로 번성하기 시작한다. 메디치 가문은 막대한 영향을 행사한다. 미켈란젤로부터 갈릴레오까지 르네상스 시대 전체를 후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디치가는 환전업 조합 가운데 하나였다. 1390년 이전만 해도 메디치가는 동네 불량배로 저질 폭력으로 유명했다. 피렌체에서 각종 범죄를 저질러 17년 간 가문 중 5명이 사형을 당했다. 그러던 중 지오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등장해 양모조합 거리에서 소규모 사업을 이끌어 피렌체의 명가로 성장시킨다.

지오반니 메디치는 고리대금 방지법을 피할 수 있는 독창적인 회계법으로 사업을 합법화 시킬 수 있었다. 이자대신 환전의 대가로 수수료를 받았다. 이자가 드러나지 않는 형태로 신용을 사고 팔았다. 고리대금업이 은행업으로 진화한 순간이었다.

리그로 세그레토 : 지오반니 메디치가 쓴 메디치 은행의 성공담이 기록된 책

메디치 은행의 성공은 다양성을 추구한데 있다. 조합형태로 분권체제를 유지했다. 피렌체, 베네치아, 로마까지 영역을 넓혔다. 규모확장과 분산을 통해 대출에 따른 위험을 줄일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채무자의 비용을 낮출 수 있었다. 이 부분이 고리대금업자와 메디치가의 차이였다.

지오반니의 아들 코시모는 부친 사망 20년 후 피렌체의 군주와 다름없는 자리에 오른다. 그는 보티첼리의 '메달을 들고 있는 청년(1475)'의 주인공 이기도 하다. (보티첼리는 '동방박사의 경배(1476)'에서도 메디치가의 금융성공을 그려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현대 금융이 미국으로 넘어오면서 세계 경제의 판도가 바뀌었다. 미국은 채무를 발판으로 성장한 나라이다. 메디치 은행이 부유층만을 상대한 반면에 미국 은행들은 누구에게나 돈을 빌려준다.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는 파산자들로 유명하다.  각종 담보 대출, 전당포, 혈액 구매 등 파산자들을 상대로 하는 경제 활동이 활발하다. 중세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파산은 경제적으로 심각한 것이었으나 미국 자본주의에서는 빚을 졌다 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1898년부터 파산법에 따라 채무 청산과 개인 회생이 보장되었다. 오늘의 파산자가 내일의 억만장자가 될 수 있었다. 실패 후 재기의 기회가 주어진다. 은행 입장에서는 대출 가운데 일부가 연체되었다고 생각하고 파산은 채무이행계획을 다시 세우는 것에 불과했다.

대출은 경제성장의 기초다. 은행의 출현이 가능해야 고리대금업에서 다음단계로 성장이 가능하다. 채무자들이 정상적으로 대출받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고리대금에서 벗어날 수 있다. 투자자 역시 믿고 맡길 곳이 있어야 자신의 지갑을 열 수 있다.

하지만 은행이 해결책은 아니다. 2007년, 멤피스의 불량 채권이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야기했다. 은행의 주택담보대출이 증권의 형태로 바뀌어 무분별한 투자자들 사이에서 거래되어 은행과 채무자의 정상적인 관계가 깨진것이 원인이다. 금융업이 지나치게 복잡해져 연이은 금융혁신으로 멤피스 같이 가난한 가정에서 받은 주택담보대출을 CDO(Collateralized Debt Obilgation : 부채담보부증권으로 회사채나 대출채권 등 기업의 채무를 기초자산으로 유동화증권을 발행하는 금융기법)로 바꿔버렸다. 납을 금으로 만들고 쓰레기를 우량채권으로 만드는 금융의 연금술이 가능했던 것은 은행과 함께 현대 금융의 양대 축을 이루는 채권시장이 급성장했기 때문이다.



2011/01/03 - [감상/다큐] - 돈의 힘(THE ASCENT OF MONEY) (BBC, 200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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